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카타가하라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그러나 신겐은 미카타가하라 평원에 [[어린진]](魚鱗陣)을 치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도쿠가와·오다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학익진]][* 진 모양이 학이 날개 편 것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상대방보다 자기 군대의 숫자가 많을 때 학이 날개로 감싸듯이 쌈싸먹기 하는 작전이다. 한국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순신]] 장군이 쓴 진법으로 유명.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은 정확히는 그 변형이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해전으로는 [[한산도 대첩]]이 유명한데, 이때도 조선 수군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민첩한 기동이 어려운 해전에서 상대보다 우월한 원거리 화력을 바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근거리 육박전의 상황에서 학익진이라는 연합군의 선택은 만용으로 판단된다.]을 선택하여 포위섬멸을 시도하였다.[[http://indoor-mama.cocolog-nifty.com/photos/kassenzu/mikatagaharanotatakaizu.html|개형적인 포진도]] 그러나 어린진[* 어린진은 쐐기 진형의 일종으로 상대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진형을 넓은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거기다 최선봉에 정예 부대를 배치해서 뚫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학익진은 아군 병사를 넓게 펼치는 것이라 어린진으로 뚫기에는 딱 좋다.]을 치고 대기하던 신겐은 학익진의 측면에 약점이 있음을 파악하고[* 하필이면 노부나가가 보낸 그 지원군이었다. 도쿠가와의 동쪽 측면.] 다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보내서 붕괴시킨 뒤[* 다케다 군의 사상자가 매우 적은 이유 중 하나가 별동대의 활약으로 학익진을 매우 빨리 붕괴시킨 것이었다. 만약 별동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겼어도 사상자가 2백 보다는 더 많은 수가 나왔을 것이다.]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연합군의 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유능한 가신들과 2천의 군사를 잃는다. 이에 반해 다케다 군 사상자는 겨우 2백 정도였다. 가신 나쓰메 요시노부[* [[나쓰메 소세키]]의 조상.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하였으나 이에야스의 용서를 받았다.]가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퇴각시켰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요시노부가 기병 25기를 이끌고 다케다 군에 돌격하여 전사했다. 이에야스는 목숨만 겨우 보존하여 겨우 하마마쓰 성에 도착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신겐의 추격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패주하면서 '''말 위에서 똥을 지렸다고 한다'''. 입성 후 패주를 잊지 않기 위해 화공을 불러 그렸다는 것이 상단의 시카미 그림.[*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저 그림이 '실제 미카타가하라 패전 직후'의 모습을 그렸을 확률은 많이 낮다고 한다.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일단 저 초상을 모델로 한 석상까지 존재한다.] 여담으로 이에야스는 하마마쓰까지 추격해온 추격군에 야습을 걸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는 후대에 이에야스를 미화하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학익진으로 어린진을 뭉개려면 어린진의 돌격에 맞서지 말고 뒤로 후퇴하면서 양날개로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펼쳐 적의 김을 빼버리게 한다.[* 한산도 대첩의 학익진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육상전에 쉽게 적용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양 날개에서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서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과도한 밀집 상태에 빠트려 돌진을 저지시킨 전투가 없지는 않다([[푸아티에 전투]]).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는 영국군이 고지대를 선점한 상태였고, 울타리와 가시덤불 때문에 영국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진로가 한정되었다. 덕분에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병들은 프랑스군의 측면에서 화력을 퍼부어 쉽게 압박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상황에서 프랑스군의 병력은 축차투입 되다가 차례로 격퇴되었다. 양익의 원거리 병과를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압박할 수 있는 평지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파타이 전투]]). 또한 학익진은 진형 특성상 통상적인 진형보다 종심이 얇고 접전면이 넓을 수 밖에 없다.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된 중앙이 뒤로 물러난다면 자연스럽게 전열에 틈이 생기거나 종심이 더욱 얇아지게 되므로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기 쉽다. 더구나 상대방이 중앙돌파를 노린다면 적은 전력(= 접전면의 얇은 종심)으로 상대방의 강력한 공세를 버텨내야 한다. 돌파를 노리는 상대방의 충격력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면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군대는 그 자체로 상당한 정예병이어야 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면서 후퇴가 패주로 바뀌지 않게 전열을 유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휘관은 적절한 시기에 상대방의 공세를 둔화시킬 카드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양과 질에서 앞서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적을 상대로 이걸 다 할 수 있는 지휘관은 명장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한니발 바르카|평지의 육상전에서 이걸 다 해내 전투에 승리한 장군]]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으며 [[칸나이 전투|후대 사람들은 그 전투를 교본으로 삼아 가르칠 정도다]](심지어 그 전투는 결과적으로 학익진이 되었을 뿐이지, 최초 포진은 오히려 중앙을 앞으로 돌출시켜 후퇴할 공간을 남겨두었다. 최초 포진부터 중앙이 뒤로 후퇴해 있는 학익진이라면 병력운용의 난이도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